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교 개혁 (문단 편집) === [[신성 로마 제국]]의 혼란 === 결국 1520년에 루터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다음해 신성 로마 제국 제국의회는 루터를 불러 신앙 검증을 요구한다. 그곳에서도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의회는 루터를 제국 밖으로 쫓아내도록 결의한다. 이는 당시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가톨릭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비록 카를 5세의 시대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초월한 지 오래였지만,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목상의 정통성은 당시의 시점에서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415년 [[독일왕]] [[지기스문트]]의 신변보장 약속을 받은 [[얀 후스]]는 화형에 처해졌지만, 카를 5세는 마르틴 루터가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어도 신변보장을 했다곤 하는데 조금 사실과 다르다. 제국 공민권을 박탈하는 제국 추방령을 내렸기에 누구든지 루터를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루터를 작센에 돌려보내자 암살자들이 뒤따랐다.] 이후 루터는 암살자를 염려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작센)|프리드리히 3세]]에게 중도에 납치당하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는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의 신학을 별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신학대에서 새로운 신학 이론을 펴고 작센에서 지지받자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내버려뒀다. 후계자인 동생 [[요한(1468)|요한]]과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열렬한 루터 지지자이긴 하다.] 루터를 보호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 바로 다음 가는 서열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선제후가 루터를 보호한다는 것은 제국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반로마 감정과 민족 감정에 따라 루터를 열렬히 지지한 독일 민중들의 열망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황제와 교황을 나란히 적으로 돌릴 만한 독일 제후들은 몇 없던 게 사실이고 1526년 슈파이어 제국회의까지조차 300여 개 영방군주와 60여 개 제국도시 중에 루터의 입장에 따라 새로운 신앙을 믿는다고 고백한 건 고작 6개 제후와 14개 제국도시 뿐이었다. 그나마도 선제후 7명 중에서는 작센 선제후 달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루터 파에게 행운이라면 당시의 카를 5세는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는 것(…). 이 즈음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초대 국왕이기도 하다. 그곳에서의 이름은 카를로스 1세.] 카를 5세는 이를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하필이면 이 무렵부터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싸고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524년에 제국 전역에서 중세 봉건 질서에 반발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이는 후에 '농민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여 독일 중·남부 전역을 휩쓸었다. 사실 카를 5세는 복잡한 종교개혁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앞서 말한대로 몸이 10개라도 모자란 상황이라 1521년에 동생 [[페르디난트 1세|페르디난트]]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넘겨주고 사실상 독일 문제를 전담하게 했다.--[[짬처리]]-- 단, 루터는 여기에서 농민들이 아닌 기존 질서를 지지하였고[* 사실 과격 혁명세력은 루터에 영감을 받아 루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루터가 거부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 중 농노제·사유재산·화폐 폐지 및 토지 분배 까지는 현대 좌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하지만, 성령체험 강조로 성령을 받은 자가 못 받은 자보다 우월하다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냈고, 성령 체험받은 새로운 상위 계층 주도의 새로운 신정정치 체제를 열며 구약성경을 근거로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며 여자가 모자라기에 소녀부터 노파까지 결혼을 거부한 미혼 여성은 사형…지배계급은 재산 몰수가 정도가 아니라 가라지나 풀무·잡초 등의 비유를 들어 적극적으로 쳐죽여야 될 대상으로 정당화했다. 또한 독일 군주들에게 자신을 지원해서 [[적그리스도]] [[교황]] 목을 따러 가겠다고 선포하는 등 이념 면에서부터 [[사이비 종교]] 냄새가 폴폴 나며, 농민보다는 몰락기사·용병·광부 유랑민들이 수적으로 우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 연구에선 독일 농민 전쟁이 특수한 예가 아니라 [[흑사병]] 이래 약 200년 동안 서유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의 난의 연속으로 보고 있다.][* 물론 농민 전쟁은 아주 광범위하게 일어난 사건인 만큼 주장도 상이하게 달랐으며 특히 이미 전부터 농민들의 혁명으로써 공화국을 세웠던 디트마르셴은 저런 주장을 하지 않았으며 [[토마스 뮌처]] 또한 지배계급을 무작정 죽이기 전에 먼저 그들을 설득시키고 그럼에도 듣지 않을 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는 농민 전쟁이 북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홀슈타인]]부터 [[스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까지 이어지던 광범위한 사건이라서 일어나는 일.] 이는 후에 루터가 농민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훗날 좌파들에게 까이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그런데 루터에 대한 근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민족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좌파 성향의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 [[무신론자]]였던 포이어바흐나 니체조차 공적을 인정하고 있고, 동독 시절 사회주의자 그룹도 토마스 뮌처를 가장 높이 치지만 그가 나올 수 있던 원동력은 루터가 필수적이었다고 본다.] 이후 루터는 1522년에 비텐베르크로 귀환하여 이러한 민중 운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기존 가톨릭 질서에 정치적으로 루터를 지도자감으로 본 농민들에겐 실망으로 다가왔다.[* 루터는 항상 본인을 신학자로 생각했으며, 신학 외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마르틴 루터]] 항목을 참고할 것.] 결국 지금까지 거의 루터 본인의 힘만으로 진행되던 개혁은 이 시점부터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히기 시작한다. 결국 [[독일 농민전쟁]] 후에 독일 땅에서 정치적 문제는 루터의 손을 넘어갔고 스위스에서 츠빙글리 노선이 원동력을 이어받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